러더퍼드와 지구물리학자

Rutherford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Frey님의 글을 읽다가 불현듯 생각이 나서 적어봅니다.

All science is either physics or stamp collecting.

이 말은 분류학자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고 합니다. 이와 관련해 고생물학자인 리처드 포티가 그의 저서인 '삼엽충(Trilobite!!)'에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비록 학명을 짓는 것이 장난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겠지만, 그 이름들은 진정한 지적인 목적에 봉사할 수 있다. ...(중략)... 유능한 분류학자들이 측정단위(종, 속 따위)를 정확히 정의하지 않았다면, 과거의 생명다양성을 어떻게 논의할 수 있었겠는가? 자신이 조사하는 종들이 어떤 것들인지 알지 못한다면, 진화를 어떻게 추측할 수 있었겠는가? 이 동물이 이 대륙에서 발견되고 저 동물이 저 대륙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을 알려줄 믿을 만한 꼬리표가 없다면 고대 생물의 지리학을 어떻게 추론할 수 있겠는가?

러더포드에게는 실례지만, 나는 완벽하게 온건한 우표수집 활동과 과학적 분류학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표수집을 할 때에는 스탠리 기번스 연갑을 뒤적여서 우표의 발행연도와 색깔, 진품 여부, 천공 상태, 심지어 현재 가치 따위를 꼼꼼히 살펴본다. 거기에는 해당 우표의 정체를 말해주는 단 하나의 정답이 있다. 그러나 과학의 질문들은 모두 정답을 향한 여행이다.

조분조분 얘기했지만, 포티의 책을 읽다보면 상당히 분노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러더퍼드가 어떤 의도로 이런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러더퍼드가 함부로 분류학을 폄하하는 뉘앙스의 말을 했다는 것은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물리학에 관한한 당대 최고였겠지만, 분류학에 관한한 문외한이었을테니까요.

포티의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포티가 과거 대륙의 복원을 놓고 지구물리학자, 특히, 고지자기학자(paleomagnetician)와 의견이 달랐을 때의 얘기입니다.

동료들은 고지자기학자(paleomagnetician)를 흔히 '고마법사(paleomagician)'라고 부르곤 한다. 빈정거림이 아주 약간 담겨 있긴 하지만, 그러나 과거로 더 올라갈수록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하며, 삼엽충의 시대까지 가면 고지자극 측정값들 가운데 신뢰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진다. ...(중략)... 고마법사들은 자신들의 과학만이 '경성' 과학이라고 선언한다. 언젠가 나는 '고지자극 하나가 화석 1,000점의 가치가 있다.'란 말을 들은 적도 있다. 나는 그 과학자가 물리학자 한 명이 고생물학자 열두 명의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을까 의구심이 든다. 남을 오도시키는 데 선수가 아닌가.

결국 고지자기학자와 포티를 비롯한 고생물학자의 논쟁 - 포티는 연성 과학대 경성 과학, 화석 대 기계장치의 대결이라 했습니다. - 결과는  표준화석인 삼엽충 Merlinia가 승리했습니다. 즉, 고생물학자가 제시한 복원이 옳았던 겁니다. 그리고 나중에 고지자기 측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분야가 다른 쪽에 대해 얘기할 때는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고지자극 하나가 화석 1,000점보다 가치 있는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제가 들어도 불쾌한 얘기네요. 지구과학은 분명히 여러 분야가 모여 있는 통합 과학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지질학, 대기과학, 해양학, 그리고 천문학(이는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만 포함시키는 걸로 압니다.)이라는 세부 분야로 나뉩니다. 그렇기에 이 분야를 공부하는데 필요한 기초과학인 물리와 화학 그리고 생물학은 필수입니다. 또한, 각 분야의 기초 과학 베이스가 다릅니다. 고생물학은 사실상 생물학에 가깝고, 지구물리학이나 대기과학, 그리고 해양학 등은 물리학에 가깝습니다. 또한, 암석학이나 광물학, 그리고 퇴적학(이는 물리, 화학적인 요소가 모두 포함되기에 좀 복잡하지만요. Frey님께서 더욱 잘 아실 겁니다.)

모든 과학은 상호보완적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존재 이유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과학은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답에 이르는 방법은 다양하며, 또한 호기심 역시 다양하기에 다양한 과학 과목이 존재하는 것이겠지요. 고등학교 과정에서 배우는 과학은 당연히 한계가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고등학교 과학 선택을 줄이면, 장담하건대 모든 선택은 화학과 생물로 집중될 겁니다. 현재 고등학생이 선택하는 과학 선택 과목의 응시자는 대략 이런 순서입니다.

화학Ⅰ>생물Ⅰ>지학Ⅰ>물리Ⅰ>생물Ⅱ>화학Ⅱ>물리Ⅱ>지학Ⅱ

그리고 사견이지만 지학Ⅱ 선택자수가 가장 적기에 - 사실 물리Ⅱ 선택자와 크게 차이 나지 않습니다. - 과목 축소 대상 0순위에 오른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지구과학Ⅱ를 빼고, 여기에 기술가정(기가)을 넣다니요. 정말 기가 막히는 일 아닌가요?

by 꼬깔 | 2009/06/05 10:59 | SCIENTIA | 트랙백 | 덧글(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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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Allenait at 2009/06/05 11:02
지금 교육부에 있는 사람들부터 교육을 받아야 할것 같군요
Commented by 꼬깔 at 2009/06/06 12:07
Allenait님// ㅠ.ㅠ
Commented by ▶◀AlexMahone at 2009/06/05 11:09
기술가정이라....

물론 실업과목도 중요하지만...

정말 기가 막히네요...

저희때만 해도 대부분 "화학-생물"을 선택했죠..

물리랑 화학 둘중에 하나는 필수로 해야하고.. 그래서 대부분 화학..

그리고 대부분 생물로 미는 분위기.. 그러나 저는 물리하고 화학을.. ㅋ


과거 힘좀 썼다~ 하는 국가들이 지구과학이 발달했죠...

그리고 러더포드경... 저런 일화가 좀 많은 걸로 압니다만..

아무튼 "교육과학기술"부에 "과학교육"은 없군요..

뭐 홈페이지 들어가봐도 영어교육부 이미지가 강하니..
Commented by 꼬깔 at 2009/06/06 12:08
▶◀AlexMahone님// 사실 제가 기가 막힌 것도 그 점이었습니다. ㅠ.ㅠ
Commented by Frey at 2009/06/05 11:09
제가 공부하는 퇴적학 같은 경우에는 물리가 거의 들어가지 않지요. 물리적인 실험을 통해 얻은 결과를 가지고 암석에 대해 해석하는 것이니까, 저 자신은 물리를 몰라도 괜찮습니다.
Commented by 꼬깔 at 2009/06/06 12:08
Frey님// 그러고보니... 퇴적학이란 것이 사실상 분석이니 오히려 화학에 가깝겠군요.
Commented by Frey at 2009/06/06 19:30
사실은 물리도 화학도 안씁니다;;; 그냥 지질학이죠;;
Commented by 미친과학자 at 2009/06/05 11:33
물리공부하는 사람들이 잘 빠지는 착각중의 하나가, '만물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기때문에 물리는 춈 우월한듯' 식의 착각에 빠지는 경우가 많죠.

.........뉴턴 이전엔 듣보잡이었던 주제들이!!!!!!!!(갑자기 열폭)
Commented by 꼬깔 at 2009/06/06 12:08
미친과학자님// ㅠ.ㅠ
Commented by 엘레시엘 at 2009/06/05 12:03
...넵. 전산학은 저기 찌그러져 있겠습니다.

......그, 그래도, 컴퓨터 없이 현대 과학은 성립할 수 없다구요!! 엉엉 ㅠㅠ
Commented by 꼬깔 at 2009/06/06 12:08
엘레시엘님// ㅠ.ㅠ
Commented by 미친과학자 at 2009/06/06 13:56
우와앙 전산학 ㅠㅠ 흑흑 크헝헝
Commented by 아브공군 at 2009/06/05 12:07
저는 자원지질학. 약간이나마 물리가 들어가긴 한데.....
하는 짓은 화학이 더 상대적으로 가깝다는..... (원소분석....)
Commented by 꼬깔 at 2009/06/06 12:09
아브공군님// 사실 물리나 화학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 과학 과목이 있겠습니까? ㅠ.ㅠ
Commented by muse at 2009/06/05 13:46
지구과학이야말로 생물+화학+물리가 합체한 과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쪽으로 봐도 무수한 자료들이 나오고 서로 상호보완적이니까요-_-. 화석이 거짓말할 줄 알았느냐 이것들아 (ㅋ)

뭐 요즘이야 biophysics 같은 상호보완적인 과도 나오고...러더퍼드 시절에 오직 겉의 모습만 보고 분류하던 시절에야 봐줄(?) 수 있더라도 유전학과 DNA를 바탕으로 한 분류의 등장으로 분류학자들을 우표수집가로 비유했다간 저 정도 온건한 반응이 안나옵니다. 갈아마시려고 할걸요?

저는 제가 사는 곳의 교육과정 때문에 고등학교 물리빼고 생물 화확만 하고 대학은 자연과학 전공으로 들어갔죠. (녹차) 그래서 공부하다가 물리지식 필요한 게 나오면 헤드뱅잉하면서 슬퍼할 뿐이고(...)

그런데 학사과정으로 물리하는 학생들 중에 저런 우월감에 빠진 사람들을 몇몇 봐요.
Commented by 꼬깔 at 2009/06/06 12:10
muse님// 그렇군요. 자기가 하는 과목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이게 지나치면 문제라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Alias at 2009/06/05 13:59
러더퍼드 식의 관점은, "가장 먼저" 논리에 기반을 두기 시작한 과학으로서의 물리를 주장하는 겁니다. 사실 19세기까지만 해도 다른 분야들이 "내적 정합성" 보다는 "정보 수집" 에 더 치우쳤던 측면이 있는지라 19세기 말에 태어나서 20세기 초의 눈부신 물리학 발전을 목도할 뿐만 아니라 주도했던 사람으로서 러더퍼드의 발언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측면은 있어요.

문제는, 그 이후 빠르게 발달한 물리가 다른 분야에 영향을 주면서 화생지 역시 20세를 거치며 "내적 정합성"을 다루는 비율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에 이것이 더 이상 "물리만의 독보적 우월성" 이 아니게 된 것이지요. 오늘날에 와서는, 물리는 수학처럼 "지식 자체" 보다는 "그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초과목으로서의 물리는 여전히 중요하고 오히려 그 중요성이 커짐에도 불구하고, "물리만의 고유한 영역" 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점점 줄어듭니다.

사실 저도 포스팅에서 가끔 언급하지만, F=ma만 갖고 뭔가를 만병통치약처럼 설명가능하다는 식의 서술 자체가 일정 부분은 "물리 만능주의"와 닿아 있습니다. 저 자신이 물리쪽이지만 그런 식의 사고방식은 현상을 탐구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거든요...
Commented by 꼬깔 at 2009/06/06 12:11
Alias님// 문제는 당시 러더퍼드의 관점을 여전히 견지하는 물리학도나 물리학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ㅠ.ㅠ 저 역시 러더퍼드의 주장 자체를 현 관점에서 문제 삼고 싶었던 것이고요. :)

좋은 말씀 잘 읽었네요. 그리고 재밌는 포스팅도 잘 보고 있답니다. :)
Commented by Bloodstone at 2009/06/05 15:17
사실 soft science는 hard science만큼 논리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이죠.
수학, 물리 전공자들은 그걸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만;
Commented by 꼬깔 at 2009/06/06 12:11
Bloodstone님// ㅠ.ㅠ
Commented by 곤충 at 2009/06/05 18:34
여기 지구과학 빠돌이 하나 손듭니다.
그냥 나누지 말고 역으로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이 있으면 안 될까요....ㅠ.ㅠ
우리의 소중한 지구를 버리지 말아주세요.(실제로 지구과학에서 다루는건 다르지만;;;)
Commented by 꼬깔 at 2009/06/06 12:12
곤충님// 그렇게 된다면 지나치게 방대해질 것 같아요. 그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는 있겠지만요.
Commented by 단순한생각 at 2009/06/05 18:55
사실 생물학 전공하는데 생물2보다 화학 2와 지구과학 2가 더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경우는 별로 없죠. 교과과정이 현재 발전을 못따라가는것도 문제지만, 각 과목간의 유기성을 인정하지 못하는것 역시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생태학이나 생리학등에서 기상학과 지질학의 비중을 안다면 쉽사리 없앤다는 이야기 할 수가 없죠.

사실 지구과학을 없앨정도로 고교 교육이 효율성을 추구한다면 생물학도 없어져야 마땅합니다. 사실 생물 2 커리큘럼에서 배운 내용을 대학교 생물학에서 적용시키는것보다, 화학 2에서 배우는 내용을 적용 시키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요. 특히 분자생물학이 발전하면서 이런 경향은 더 가속화되었구요.
Commented by 꼬깔 at 2009/06/06 12:12
단순한생각님// 휴... 문제는 학문적인 측면보다 교육적인 측면에서 이미 지구과학이란 과목이 있는데, 이를 뺀다는 거... ㅠ.ㅠ
Commented by asianote at 2009/06/05 20:28
노벨상의 폐해에 대해 굳이 말한다면 물리학, 화학, 의학을 제외한 모든 과학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하게 되었다고 지적하겠습니다. 특히 분류학과 같은 학문은 과학계에서 인기 없는 학문으로 취급되고 있는게 현실입니다. 생물학의 최근 추세도 분자생물학이나 생화학같은 미시과학이 인기를 끌고 있어서 생태학같은 분야는 우리나라에서 지나치게 저평가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적어도 정부에서는 과학에서 지나치게 성과 위주의 평가를 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꼬깔님이 좋아하시는 고생물학도 우리나라 과학도들에게는 좀 듣보잡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Commented by 꼬깔 at 2009/06/06 12:13
asianote님// 그렇군요. 그런데 정말 분류학자들이 아니었다면 생물학의 근간이 흔들리지 않았겠습니까? ㅠ.ㅠ 그리고 말씀처럼 고생물학은 지질학과 내에서도 인기가 없는 분야기도 합니다. ㅠ.ㅠ
Commented by Bloodstone at 2009/06/06 21:55
거시생물학 전공을 희망하고 있는 학부생으로서 정말 슬픕니다ㅠㅠ
Commented by 우기 at 2009/06/05 23:04
지구과학이 너무 어려워 물리, 화학을 선택하고 결국 생물(!)을 전공한 저이지만 참 당황스러운 결정이네요. 물론 저것도 '실용주의'의 일환이겠지요? 그럴바에는 모든 과학과목의 심화과정을 없애고 차라리 기초과정을 더 잘 가르친 후, 이과계열학생만 대학진학후 심화과정을 듣는게 낫겠군요.

공부하면 할수록 분야를 나눈다는게 힘든게 과학이라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분화하고 다시만나게 되니까요. 구조조정시 1순위인 연구원, 비용삭감시 1순위인 연구비... 기초과학부분을 홀대하면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걸 언제쯤 윗분들이 이해하실까요. 그렇게 좋아하시는 경제는 과연 과학에 대한 투자없이 될까요.
Commented by 꼬깔 at 2009/06/06 12:13
우기님// 실용주의... ㅠ.ㅠ 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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